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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쉽'의 연결고리/이름하여 공동체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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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
(공동체에 대한 이해 1)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신만의 살아 남는 방법이 있다. 카멜레온은 보호색을 가졌다. 사자는 강력한 이빨과 발톱을 가졌으며, 개는 뛰어난 후각을 가졌고, 말은 뛰어난 다리를 가졌다. 고슴도치는 온몸을 보호할 수 있는 가시를 가졌으며, 스컹크는 고약한 냄새를 무기로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진 것은 무엇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부분의 생물은 무리를 지어서 살아간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아남는 생존의 확률을 여러모로 증가 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더 강력한 개체가 있다 하더라도 공격할 수도 있고, 때로는 방어를 하는 입장에서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서로 무리를 지어서 살아가는 것은 동물의 생존 방법만으로 해석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는 그 자체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人의 의미는?

 人의 이야기 한자를 살펴보면 그에 얽힌 이야기들 중에서 재미있는 것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사람에 관련된 한자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조상들은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대하여 알려주려 하고 있다 생각이 들 정도로 메세지가 있다.

사람을 나타내는 人(인)을 보자. 획은 2번이고, 두 개의 선이 맞닿아 있는 형태이다. 누구나 한번 보면 쉽게 기억이 남을 정도로 쉬운 글자이다. 이 두 개의 선은 2명의 사람을 나타내고 있다. 한 사람은 길을 가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돌에 걸려서 쓰려지려 하고 있었다. 그 때 옆에 있던 사람은 넘어지는 사람을 손을 내밀어 잡아 주었다. 

사람을 나타내는 한자는 두 개의 획으로 이뤄져 있으나 그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는 심오하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울 수가 있다. 사람에게는 혼자서 아무리 잘해도 넘어설 수 없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뒤에 눈이 없다는 것, 손이 두 개라는 것이 가져오는 한계를 생각해 보면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사람이라는 것은 연약해서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철학으로 삼고 人이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혼자인 사람은 없다

사람은 늘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마치 높은 곳에 있는 물에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그 위치에 다른 사람의 도움은 채워져 간다. 그 필요에 대하여 100% 해결이 안될 수도 있지만 식량 문제로 어려움을 느끼는 나라에 선진국의 지원이 들어간다던가, 또는 NGO 단체들의 구호 활동은 어려운 이들의 필요를 채워간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진실은 어느 누구나 도움을 한번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고, 돈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분명 도움은 받았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 진리가 그것을 대변해주는데, 세상이 처음 시작한 후부터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가지지 않고 태어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이도 ‘나는 혼자이다.’ 라고 할 수는 있지만 ‘혼자 였다’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정은 사람의 삶을 책임지는 1차 집단이다. 가정 속에서 새로 태어난 생명은 보호를 받아야 하는 가장 연약한 존재이다. 그는 스스로 무언가를 구해오거나 가정의 필요한 것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가정 안에서 그는 소중하다 여김을 받는다. 마치 새 생명에 필요한 것이 가정에 필요한 전부인 것처럼 지원이 흘러갈 때도 있다.

왜 사람은 혼자 태어나지 않는 것일까? 생물학적인 접근이 아닌 공동체를 부여 받으며 태어나는 사람은 과언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접근하길 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연약한 존재로 태어나 가정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자라난다. 하지만 본인이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언제나 물리적인 한계에 갇혀 있다. 예를 들어 갑자기 온 지구에 모든 사람이 다 죽고 나 홀로 남았다고 생각해보라. 그 삭막함이 주는 두려움도 있겠으나, 막상 전기를 생산해줄 이도 없고, 지하철을 운행해줄 이도 없다. 내가 다쳐서 아파도 나를 돌봐줄 이 없으며, 막상 우리는 어떻게 농사를 지어야 하는지, 어디서 먹을 것을 해결해야 하는지 난감하기만 하다. 아니 어떤 이는 자급자족하면서 사는 법을 배운 적이 있다. 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소통할 수 없는 이가 아무도 없을 때에 그가 정상적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접근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서 깨닫고 넘어가야 한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기에 혼자서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군중 속의 고독

과거 사람들은 세상에 사람은 자신들 밖에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자신들의 대륙 끝에는 바다가 있고 바다의 끝에는 끝이 없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새 대륙의 발견은 그들이 세상에 가지는 관점을 다르게 가지도록 하게 해주었다. 오늘날에는 과학의 발전으로 탈것들이 개발이 되면서 걸어서는 절대 다다를 수 없는 지구 반대편도 하루 안에 도착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넓은 지구를 소통이 가능한 범위라 생각하며 ‘지구촌’이라 붙이기도 한다.

물리적인 거리는 여전히 멀다. 하지만 우리가 그 거리를 다다르는 시간이 짧아졌다는 것이 현대 과학의 유산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것조차 골동품이 되어가고 있다. 통신 기술을 발달도 몸이 이곳에는 없지만 목소리와 얼굴 뿐만 아니라 홀로그램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에 굳이 하루라는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즉시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니 체감적으로 느껴지는 지구의 거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 전체가 이렇게 좁아지고 있으니 한 나라 안에서 또는 한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서로 교통할 수 있는 방법들은 무수히도 많다. 얼마든지 보고 싶은 사람에게 전화나 문자를 보낼 수 있으며, 얼굴이 보고 싶을 때에는 화상 통화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렇게 과거보다 더 연락을 많이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독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독으로 인한 우울증을 호소한다. 더 많은 사람들을 더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는데, 사람들은 더 고독을 느낀다. 그리고 이제는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와 닿는 말이 되었다.


소모품이 되어가는 사람의 가치


왜 세상은 점점 고독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곳이 되어갈까? 공동체를 부여 받는 사람이 왜 갈 수록 고독을 느끼며 살게 되는 것일까? 산업 혁명 이후로 사람들이 물질적인 것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되면서, 사람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하락하게 되었다. 이후 계속되는 사회 체제는 ‘경제’를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사람의 평가 또한 경제적인 가치를 생산할 수 있냐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다. 결국 사람을 전혀 다르게 보게 되었는데 기업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소모품으로 여기게 되었다.

기업은 하나의 커다란 기계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최고의 ‘선’은 기업이 멈추지 않고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어서 그 안에 작은 역할들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부품은 망가질 경우 버려지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된다. 그 과정에서 그 어느 누구도 도덕적인 책임을 느끼거나 하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이 고독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말해줄 공동체의 상실에 있다. 그리고 그 상실의 주범은 물질 만능 주의로 인한 인간 가치의 하락에서 온다. 공동체가 인간에 대한 가치에 대한 이해를 상실하자 그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처사도 바꾸게 되었다. 1차적 집단이었던 가정 외에 다른 공동체를 가지게 되는 인간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낄 수가 없게 되어 군중이 아니 사회적으로 고독을 느끼게 된다.


사람에 대한 이해

사람에 대한 이해 시대를 보면 그 시대의 중요 가치가 비판을 받으며 전혀 반대의 가치가 새롭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난 세기에 시대적 최고 가치는 ‘돈’이었다. 사람도 기업도 때로는 국가의 원수도 경영 능력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로 인한 현대의 폐단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상실해 버리는 시대가 되었다. 

최근의 기업의 키워드도 ‘사람을 생각하는 기업’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시대적인 가치가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오늘날 시대적인 요청은 사람을 생각하는 기업, 사람을 생각하는 리더를 원한다. 과거의 폐단을 역사의 뒷 길로 보내고 그 모든 과오를 바로 잡을 새로운 리더는 사람에 대한 이해부터 해야 한다. 그러니 지금 꾸리고 있는 공동체를 더 성장 시키기 원한다면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더 고민하도록 하자.





올포스트 칼럼니스트(문화) '연결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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